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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사망한 후 15개월 후에 임신해 아이를 낳은 모델의 사연이 전해졌다. 보통 임신 기간 10개월이란 것을 감안할 때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한편의 러브 스토리처럼 들리는 이 사연 속 태어난 아기는 '사후 정자 채취(posthumous sperm retrieval, PSR)'라는 시술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죽은 남자의 고환에서 정자를 채취해 임신을 한다는 개념은 고인이 된 사람의 동의 문제와, 신체 존엄성 등의 윤리적 문제, 법적 문제로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몇몇 국가들에서 주에 따라 합법화 하고 있으며, 대개는 법률과 문화, 윤리적 기준이 국가와 주마다 상이해 사회적 합의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 사연은 호주 퀸즐랜드에서 일어난 일로, 사후 정자 채취로 수정이 합법화된 주다. 영국 일간 더선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호주 출신의 모델 엘리디 풀린(31세)과 스노보드 선수 알렉스 첨피 풀린은 부부였다.
알렉스는 2010년, 2014년, 2018년 동계올림픽에 출전하기도 했지만, 스피어낚시(스노쿨링처럼 바다에 들어가 작살로 고기를 잡는 방식)를 하던 중 익사 사고를 당했다. 이로 인해 상상할 수 없는 상실감과 고통을 겪은 엘리디는 사후 정자 채취 시술을 알게되면서 남편의 몸에서 정자를 채취했고, 그렇게 이들에게 기적의 2세가 태어났다.
최근 한 팟캐스트에 출연한 엘리디는 자신의 사연을 공개하면서 태어난 아기의 근황도 알렸다. 퀸즐랜드에 사는 엘리디는 알렉스와 10년 가까이 만났다. 지난 2020년 7월 8일 여느때 처럼 평범한 날, '오늘은 서핑을 할까, 아니면 다이빙을 할까' 사소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알렉스는 스피어 낚시를 하러 갔다. 엘리디는 알렉스가 집을 나서는 것까지 보고 반려견인 매니를 산책시켰다.
얼마 후 믿지 못할 소식이 전해졌다. 해변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어떤 남자가 발견됐다는 소식. 처음엔 남편일 리가 없고 다른 사람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 남자가 알렉스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비현실적인 감정을 겪었다.
얕은 수심에서 숨 오래참다 의식잃고 사망한 남편...12시간 후 사후 정자 채취 결심
당시 32세에 불과했던 알렉스는 스피어 낚시를 하면서 숨을 너무 오래 참으려다 '얕은 수심에서의 저산소증(shallow-water blackout)'을 겪은 후 익사했다. 이 현상은 얕은 물에서 수영하거나 잠수할 때 발생하는 현기증과 의식 상실을 말한다.
보통 잠수부들은 과도한 호흡을 통해 체내 이산화탄소(CO2) 수준을 낮춰 호흡 욕구를 줄이는 방식으로 숨을 오래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이산화탄소는 호흡을 자극하는 주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너무 낮아지면 뇌가 산소 부족을 감지하지 못하고 결국 의식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이로 인해 알렉스도 의식을 잃고 익사한 것이었다.
알렉스는 2014년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호주 대표팀의 기수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스포츠계는 물론 엘리디의 삶도 뒤흔들었다.
알렉스가 사망한 지 불과 몇 시간 후, 엘리디의 친구와 가족들은 이 부부가 '아기를 갖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후 정자 채취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알렉스가 사망한지 12시간도 지나지 않아 엘리디는 이에 동의했고 정자 채취가 이뤄졌다. 그렇게 엘리디는 알렉스의 채취된 정자로 시험관 아기 과정을 시작했다.
두 차례의 시험관 아기 시술 끝에 2021년 10월에 딸 미니 알렉스 풀린을 출산했다. 엘리디는 딸의 눈에서 알렉스를 본다.
엘리디는 "그가 얼마나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는지 알기에 지금 딸을 못보는 것이 가장 슬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엘리디는 "사후 정자 채취 당시, 알렉스의 정자가 아직 건강하게 살아있어서 딸을 가질 수 있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엘디아가 사후 정자 채취를 통해 임신하기까지 타임라인
△2020년 7월 8일: 호주의 올림픽 스노보더였던 알렉스가 32세로 사망. 엘리디와 약 9개월 동안 임신을 시도하고 있었음.
△사망 직후: 알렉스의 사망 직후, 엘리디의 친구와 가족은 사후 정자 채취에 대해 제안했고, 엘리디는 충격과 슬픔 속에서도 이 제안을 받아들임.
△사후 정자 채취: 알렉스 사망 후 36시간 이내에 정자 채취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짐. 이 절차는 앤드류 데이비슨 박사에 의해 수행.
△2020년 12월: 첫 번째 IVF(시험관 수정) 시도를 시작했으나 실패.
△2021년 초: 두 번째 IVF 시도에서 성공적으로 임신.
△2021년 10월 25일: 딸 미니 알렉스 풀린(Minnie Alex Pullin)을 출산. 알렉스가 세상을 떠난 지 약 15개월 후였음.
일반적으로 뇌사 상태이거나 사망 선언 직후의 환자에게서 정자를 추출할 수는 있으며 임신 수정을 위해서는 사망 후 약 24~36시간이 추출 권장 기간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후 정자 채취, 사망후 24~36시간 내 건강한 정자 추출 가능
사후 정자 채취에 대한 문서는 1980년 처음으로 보고됐다. 세상에서 사후 정자 채취로 임신한 첫 번째 아기는 1999년에 태어났다. 비뇨기과 전문의이자 UCLA 남성 클리닉의 디렉터인 제시 밀스 박사는 "일반적으로 뇌사 상태이거나 사망 선언 직후의 환자에게서 정자를 추출할 수 있다"며, "사망 후 약 24~36시간이 권장 기간이다"고 설명했다.
이론적으로 정자는 남성이 사망한 뒤에도 전립선 전기 자극이나 수술을 통해 채취할 수 있고 냉동할 수도 있다. 이전 연구결과에서도 죽은 남성에게서 채취한 정자가 사망 뒤 48시간 내에 회수될 경우 건강한 임신을 통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근거가 확보되기도 했다.
외과의나 비뇨기과 의사가 부고환 흡인(피부를 통해 바늘로 정자를 추출), 고환 생검 또는 고환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식으로 정자를 추출해 낸다. 정자를 추출한 후에는 불임 클리닉에 있는 기증자의 정액을 냉동 보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정자를 냉동해 보관하고, 수정에 사용한다.
올해 초 호주의 한 60대 여성이 사망한 남편의 정자를 채취하는 권리를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은 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호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WA)주 대법원은 지난 2023년 12월 18일 죽은 남편(61) 몸에서 정자를 추출할 수 있게 허가해 달라고 요청한 62세의 여성에게 허가 판결을 내렸다.
이들 부부는 지난 2013년 스물 아홉살의 딸을 익사 사고로 잃고, 2019년에는 서른 살의 아들마저 교통 사고로 먼저 떠나보냈다.
부부는 다시 아이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병원에서 두 사람의 나이 때문에 임신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 대리모를 통한 출산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남편까지 잃게 된 이 여성은 남편이 죽은 후 대법원을 찾아 사후 정자 채취를 허락해달라는 내용의 긴급 심리를 요청했다. WA주 대법원 피오나 시워드 판사는 사망한 남편이 정자를 추출하는 것에 반대 사유가 없다며 이를 허가했다. 이 주법에 따르면, 사망한 사람의 신체에서 조직 등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이 판결로 체외 수정이 허락된 것은 아니다. 사망한 남편의 정자로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는 별도의 법원 명령이 필요하다. WA주는 현재 사후 수정이 허용되지 않는 지역으로, 이 여성이 체외수정을 해 대리모를 통한 출산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에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 호주에서는 앞서 소개한 사연의 엘디아가 사는 퀸즐랜드, 빅토리아, 뉴사우스웨일스 등 지역에서 사후 정자 체외 수정을 허용하고 있다.
영국에서 사후 정자 채취 조건부 허용...국내에서는 법적 논의나 법률 마련돼 있지 않아
영국에서 사후 정자 채취는 조건부로 허용되지만 엄격하게 규제되고 있다. 이 절차는 사망 전에 고인이 명시적으로 서면 동의를 제공해야만 수행될 수 있다. 영국 법에 따르면 이러한 서면 동의 없이 정자를 채취하거나 사용하는 것은 불법이며,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영국에서 사후 정자 기증이 조건부로 법적으로 허용된 선례로는 1997년 한 여성이 죽은 남편 정자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 출산한 사례가 있다.
스티븐 블러드는 1995년 2월 아내 다이앤과 가정을 꾸린 지 두 달 만에 뇌수막염에 걸렸고, 정자 샘플을 채취했지만 사후 정자가 사용될 수 있도록 서명하기 전 혼수상태에 빠진 뒤 사망했다.
1990년 제정된 영국법에 따라 처음에 법원은 블러드 부인이 남편 동의 없이 정자를 사용하는 걸 금지했다. 하지만 항소법원은 영국이 아닌 유럽연합(EU) 회원국에서 임신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다이앤은 2002년 남편의 냉동 정자를 이용해 아들 조엘을 낳았다. 이후 죽은 남편이 조엘 아버지로 인정받게 하는 법정 투쟁을 진행했고 승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사후 정자 채취에 대한 법적 논의나 명확한 법률이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정자 채취와 관련된 다양한 의료 절차와 기준은 있지만 주로 불임 치료와 관련된 것들로, 사후 정자 채취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고, 구체적인 법적 규제나 명확한 지침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