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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을 오르지 않고는 경주를 안다고 하지 마라’고 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이고 신라시대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는 부처가 상주하는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되어 왔다.
경주는 도시 곳곳이 유적과 유물로 가득 찬 ‘도시 박물관’이다. 건국부터 멸망에 이르는 922년 동안 신라의 수도였고 불국사, 석굴암, 옥산서원, 양동마을과 더불어 시내 일원 5곳의 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경주 앞산인 남산(南山)은 396점의 문화재가 곳곳에 산적해 있어 산 전체가 불교 박물관이다. 북쪽의 금오봉(468m)과 남쪽의 고위봉(495m), 두 봉우리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8km 동서로 4km를 차지하는 남산에서는 지금까지 100여 곳의 절터, 89여 구의 석불, 60여 기의 석탑이 발견됐다.
특히 2007년 이곳에서 큰 발견이 있었다. 길이 6m, 무게 80t에 달하는 대형 마애불상이 앞으로 넘어진 상태로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남산 열암곡에 자리잡고 있어 이후 ‘열암곡 마애불’로 이름 붙여졌다. 암반과 불과 5cm 떨어져 있는 위태로운 상태지만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된 덕에 ‘5cm의 기적’으로도 불린다.
조계종단은 한국에 불교가 도래한지 1700여년이 되는 시점에서, 한국 불교의 위상을 높이고 ‘천년불교’로 중흥하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천년을 세우다’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열암곡 마애불은 그 프로젝트의 중심이다.
그 일환으로 작년 4월 28일부터 ‘열암곡 마애불 올바로 모시기 1000일 기도’가 시작됐다. 1주년을 즈음해서 경주 남산을 찾았다. 특별히 이번 방문길엔 이곳 마애불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대기업 회장과 동행했다.
경주의 중심상권 보문단지에서 자동차로 30여분 달리면 열암곡으로 올라갈 수 있는 새갓골 주차장에 닿는다. 새갓골은 열암곡의 다른 이름인데 ‘산 사이의 골짜기’라는 의미다.
입구에서 열암곡 기도 도감(都監)을 맡고 있는 여진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올라가는 길에 열암곡 보살님께 전달할 짐을 나눠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대기업 회장이라고 예외일 순 없다. 1.2km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 25분 만에 마애불에 도착했다. 과거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알리는 ‘새갓골 절터 1호’라고 적힌 표지판이 눈에 보였다.
앞으로 넘어진 마애불 주변은 깔끔하게 정리됐고 보존각을 설치해 놨다. 주변엔 얼굴이 뭉개진 석불좌상이 마애불을 지키고 있다. 조선시대에 머리 부분이 잘려졌고 이 상태로 오래 방치돼 있었는데, 2005년에서야 석불의 머리를 찾아내 복원했다.
이곳 열암곡의 마애불은 워낙 화제가 된 터라, 전국의 불자들이 찾는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날엔 전남의 백양사 교구에서 많은 불자들이 방문했다. 당번으로 봉사 나온 보살(불교의 여자신도) 한 분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땀방울을 훔치며 일하는 모습을 보니 잔손을 거들게 됐다. 여진 도감스님의 안내를 받아 백양사 주지 무공스님이 땀을 닦으며 앞장서고 여러 스님과 불자들이 뒤따라 올라왔다.
마애불 뒤편 숲길 속엔 ‘새갓골 제2사지’라는 표지판과 함께 남산 기슭의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공간이 있다. 작은 암자가 있기에 어울리는 공간이지만 지금은 비어 있다. 어쩌면 먼 옛날엔 제1사지(절터), 제2사지, 마애불, 석불좌상을 모두 품은 큰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양사 교구의 스님과 불자들이 다례를 차리고 법회를 준비했다. 다음주에는 1000일 기도 1주년을 맞은 기념 법회를 불국사 신도들이 참여해 연다고 한다. 지난해 9월 은해사를 시작으로 매월 첫째 주 토요일마다 릴레이 법회가 이어지고 있다.
범어사(10월), 직지사(11월), 고은사(12월), 올해는 해인사(3월), 관음사(4월)의 스님과 신도들이 찾았다. 꼭 매월 첫 번째 토요일이 아니더라도 백양사처럼 중간중간에 날을 잡고 방문하는 불자들이 있다고 한다.
열암곡 마애불은 무게가 80t에 달하는 큼지막한 바위덩어리에 부조로 조각한 불상이다.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주 지역에 지진이 잇따랐던 1430년경에 넘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구체적인 시점은 연구마다 다르다).
그리고 잊혀졌다. 큰 바위들이 흩어진 산 경사면에 수목과 흙, 낙엽이 서서히 쌓이며 사람들 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2007년 5월에서야 다시 발견됐다. 앞서 언급한 머리가 잘린 석불좌상의 주변 조사와 진입로를 찾는 작업을 하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들에 의해서다. 불상 얼굴면의 원형은 잘 보존돼 있었다. 얼굴이 땅바닥에 거의 붙어있던 형태여서 비바람 등에 풍화되지 않아서다.
광복된 이후에 통일신라시대의 완벽한 모습을 갖춘 대형 마애불상이 새로 발견된 건 처음이었다. 이후 현지답사와 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지붕까지 덮어 보존각을 설치했다. 현재는 틈새를 통해서만 5cm의 기적을 확인할 수 있다.
발견 이후 처분을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코가 아름다운 부처님이 엎드려 고통받고 있으니 원래 모습대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600년쯤을 엎드려 계셔도 부처님이고 자비로운 모습이니 그대로 두자는 목소리도 있다.
복원을 하려고 해도 엄청난 무게와 마애불 주변의 연약한 지반은 걸림돌이다. 원래 어디에 있던 것인지 정확한 위치도 모른다. 때문에 원상복구는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조계종단과 문화재청은 안정성과 적정성 평가를 한 후에 가장 적절한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라고 한다.
백양사 스님들의 목탁 소리에 맞춘 예불 소리를 들으며, 당번 보살이 챙겨준 김밥 두 꾸러미를 쥐고 칠불암과 신선암 마애불로 발길을 옮겼다.
열암곡 마애불에서 30여분쯤 더 산길을 오르면 봉수대 정상이 나온다. 여기서 암벽길 따라 더 나아가면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을 만난다. 역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소중한 유산(보물)이다.
동남향으로 높이 솟은 벼랑 바위(신선암) 경사면에 새겨진 마애보살반가상이 경주평야를 내려다보고 토암산을 마주하고 있다. 너비는 1.3m, 높이는 2.3m로 남산에 있는 마애불 중 가장 풍광이 뛰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경주, 역사를 품은 여행’을 쓴 심상섭 작가를 이곳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는 마애불에 대한 풍부한 식견을 막힘없이 전달해줬다. 꼼꼼한 설명을 듣고 보니 마애보살은 손에 용화 꽃가지를 들고 머리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어 영락없는 미륵보살 같다. 엄마의 미소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지닌 보살상은 의자에 걸터앉고 아래에는 구름이 피어오르는 묘사로 새겨 마치 남산 자락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곳에서 암벽 급경사를 200여m 내려오면 칠불암(七佛庵)이 나온다. 2개의 큰 암석에 조각된 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 등 7개의 불상이 있는 곳이다. 남산의 수많은 문화재 중 유일한 국보로서 조각 기법과 양식을 기반으로 볼 때 통일신라 8세기쯤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 바위에는 사방불, 뒤쪽 바위에는 삼존불을 새겼는데 삼존불은 곡선의 표현이 강조된 아미타삼존불이라 하며 사방불은 약사여래 이외에는 불상의 명칭을 확정하기 어렵다고 한다. 주위에 2기의 석탑으로 추정되는 지붕돌·석등대석 등 유물이 있어 이곳은 ‘봉화곡 제1사지’로 분류된다.
칠불암에서 말레이시아 출신의 비구니 예진스님을 만났다. 그는 어색한 한국말 솜씨로도 능숙하게 종무실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절에는 태국에서 온 스님도 있다고 한다.
외국 출신 비구니 스님들이 주로 머무는 칠불암에서는 스님과 신도 구분 없이 저마다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법당과 종무소, 차실이 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사랑방 같은 암자였다.
남산 여기저기에서 있는 석불, 마애불을 보며 과거 석공은 어떤 마음으로 긴 시간 암벽과 돌에 부처의 모습을 새기고 무엇을 기원했을까, 떠올려봤다. 그들의 열정과 경이로움, 그 바탕에 내재된 신심(信心)을 가늠해 본다.
남산에 있던 용장사에서 김시습은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썼다. 금오는 남산의 주봉우리인 금오봉 일컫는다. 금오신화라는 제목은 ‘금오산의 신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 신(新)자를 써 ‘금오산의 새로운 이야기’라는 뜻이라 한다.
경주 남산은 신라 시조의 탄생지이며 신라 1000년 왕조의 막을 내린 포석정의 비극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했다고 하여 남산에 얽힌 전설이 풍부하고 다양하다. 덕분에 신라에서 남산은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배되었다. 불교 유적이 가득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열암곡 절터에서 발견된 석불좌상은 현재 모습으로 복원 정비되기 전까진 파손되어 머리 부분이 없는 상태로 방치됐다. 침식곡에 있는 석불좌상도 머리가 없다. 용장사지 석불좌상도 그렇다.
숭유억불을 시행했던 조선시대 때 많은 불교 유적들이 양반들에게 파괴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남산의 불상들이 부수기 쉬우면서도 상징성이 큰 안면부, 목 부위가 주로 훼손됐다.
경주 남산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북으로 긴 타원형이다. 40여개의 변화무쌍한 계곡과 기암괴석 만물상 등이 있는 산줄기로 이뤄져 있다.
봉우리를 올라가는 등산 코스도 동서남북으로 십수 개에 이른다. 해발고도는 500m에도 못 미치지만 문화재의 재료가 되었을 단단한 화강암 바위들로 꽉 차 있는 돌산이고 골들이 깊어 초보 등산객에겐 까다로운 코스다.
하루 만에 남산의 주요 문화재를 모두 보는 건 여의치 않아 지도를 보면서 코스를 잘 선택할 필요가 있다. 초보 산행객을 위해 ‘경주 남산 문화재답사 길’이 조성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이번엔 새갓골 주차장에서 새갓골 탐방로를 따라 열암곡 석불좌상과 마애불, 다시 신선암 마애불을 들러 봉화곡 칠불암까지 2.4km 구간을 돌아봤다. 그리고 다시 고위봉 방향으로 올라와 백운재 길을 따라 백운암까지 갔으나 그곳에서 길을 헤매다 열반재를 지나 천룡사지 삼층석탑까지 갔다.
언젠가 다시 남산에 오겠다 다짐했다. 그때는 7m 마애불을 비롯한 수많은 마애불과 불상들이 있는 삼릉계곡을 통해 금오산 정상에도 오르고, 경주를 내려다보고 있는 삼층석탑과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썼다는 ‘용장사지’도 가볼 것이다. 조선시대에 머리가 훼손된 남산의 또 다른 석불인 ‘용장사터 석불좌상’도 들러볼 생각이다.
모든 골짜기, 능선마다 목탁 소리가 울려 퍼지며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통일을 기원하고 흩어진 민심을 모으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했던 남산의 기운을 모아 열암곡 마애불 바로 모시는 ‘천년을 세우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기원해본다. 열암곡 마애불과 함께 대한민국의 기운도 함께 우뚝 설 것을 기대하며….